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행주 기씨 (문단 편집) === 족보 재정립 후 역사 (기순우~기찬) === 시조 기순우의 아들(2세)은 문하평장사 기수전(奇守全)이며, 3세는 4형제로 기윤위(奇允偉), 기윤숙(奇允肅), 기필선(奇弼善), 기필준(奇弼俊)이 있었는데 이 중 기윤위와 기윤숙이 [[고종(고려)]] 때 장군으로서 이장대(李將大)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각각 격퇴하였다. [[명종(고려)]] 때는 부원수 기탁성(奇卓誠)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충렬왕]] 때는 기자오가 나얀(乃顔)의 난을 평정하였다.[* 나얀은 [[몽골 제국]]의 시조인 [[칭기즈 칸]]의 동생이자 [[동방 3왕가]]의 시조 중 한 명인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으로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과 대립하다 몰락했다.] 기자오의 딸은 1333년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1334년([[충숙왕]] 복위 3년) 14세 때 [[원혜종]]의 후궁이 되어 40년([[충혜왕]] 복위 1년)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보현숙성황후 기씨, 줄여서 [[기황후]]가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0548&cid=40942&categoryId=31639|두산백과]] 즉 정리해보면 기탁성 이전의 기씨는 크게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이나 기정업이 의관, 기탁성이 무신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군반씨족 등의 하급귀족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였던 걸로 보이나, 기탁성이 라인을 잘 타 출세하자 기윤위, 기윤숙, 기필선, 기필준 등의 후손들도 관직에 올라 권세를 이어갔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관직에 올랐던 중요한 인물임에도 정작 세계나 가족관계,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보이는 시조 기순우나 그 아들 기수전과의 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주요인물로 등장하였다.] 다만 [[고려사절요]]에서 [[덕종(고려)|덕종]]의 치세가 2년째이던 해에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 11인이 고려에 귀부했다는 기록을 놓고볼 때 기씨 성은 '''[[발해]]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씨들이 발해에서 왔음을 추론하면 936년에 기언(奇言)을 시작으로 기씨가 처음 언급되는 것이 설명될 뿐만 아니라 기씨들이 유력한 문반 씨족이 아닌 하급무관 가문에서 시작을 끊어 출세한 배경이 더더욱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926년[* 혹은 934년], [[대광현]]이 발해인 '''수만 호(戶)'''를 이끌고 고려에 귀부했을 때 [[왕건]]이 그의 좌우 장상과 군관들에게 벼슬을 내린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기언(奇言)과 그 이후의 기씨들이 발해계였음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황후와 기철 남매가 고려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을 당시, 행주 기씨 가문 모두가 기철 일파에 붙었던 것은 아니었고 공민왕의 심복이었던 [[신돈]]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7세 기현(奇顯, 1303 ~ 1371)과 8세 기중수(奇仲脩, ? ~ 1371) 부자도 있었다. 만약 저때 모든 기씨가 기철 일파와 함께하다 몰살당했다면 아예 후손이 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현은 신돈에게 자택도 내줄 정도로 극렬 지지자였으나 신돈이 몰락할 때 다른 측근들과 함께 제거당했다. 기중수는 기현의 아들이었으며 역시 신돈의 몰락 때 함께 죽었다. 조선 전기의 청백리로 유명한 청파(靑坡) 기건(奇虔)[* [[아호]]인 청파가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집이 현 청파동 일대 부근인 만리재(한자로는 萬里峴만리현)에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혹은 청파라는 단어 자체가 푸른 언덕이란 뜻이기 때문에 지명이 먼저 있었고 거기서 청파라는 아호를 딴 것일 수도 있다. 거주지명을 아호로 쓰는 경우도 상당히 흔했기 때문.]이 바로 기현의 증손자인데[* 기현의 장남인 기중평(奇仲平)의 손자가 되는데 기중평 또한 신돈 일파가 숙청될 때 같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연안군]]수(延郡守)로 있을 때 주민들이 붕어잡이로 고충을 겪는 걸 보고 부임 3년 동안 한 번도 붕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제주도|제주]]목사로 부임했는데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주민들이 전복따기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똑같이 전복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정무(貞武=정무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